[이글루스렛츠리뷰] 상실의 상속 책/만화, 소설, 잡지, 그외

이 책은 『상실의 상속』이란 제목을 가지고 있고 그 제목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야기한 『상실의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야기한 상실과 조금 다른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같거나 그냥 폭이 더 넓을지도 모르겠다. 무엇이건 상실은 상실이다. 그것만은 달라지지 않는다.



상실의 상속
키란 데사이 지음, 김석희 옮김 / 이레








이 책을 신청하게 된 건 책 제목의 특이함에 이끌려 책소개를 읽었을 때 본 한 단락 때문이었다.


“공부야말로 그가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기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그가 영국에서 맛보아야 했던 것은 지독한 열등감이었다.

그는 자신의 피부색이 이상하고, 자신의 말투가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웃는 법을 잊어버렸고, 입술을 들어 간신히 미소를 지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럴 때에도 그의 잇몸과 이를 남들이 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실제로 그는 남에게 불쾌감을 줄까봐 몸을 거의 옷 밖으로 드러내지 못했다. 그는 냄새가 난다는 소리를 들을까 두려워 강박적으로 몸을 씻기 시작했다. (p. 77)


.... 어쩐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열등감. 최소한의 강박감을 느껴본 적이 있다. 그래서 저 부분에서 아아, 라는 혼잣말을 했었다. 그리고 신청했다.

책은 두꺼웠다. 나는 몇주 내내 책만 가지고 다닌 채 읽지 않고 있다가 어제 렛츠리뷰 담당자님이 마감임박을 알려주셔서 급박하게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읽는데 세시간 정도 꼬박 걸린 것 같은데, 이건 일단 배경이 익숙한 곳이 아니어서 그랬던 것 같다. 배경이 익숙하지 않다는 것은 음식 이름 등의 고유명사가 낯설은 것이 툭툭 화면에 떨어져 내린다는 것이고, 그 음식의 낯설음만큼 생활 방식도 다른 것이며 그 다름에 익숙해지는데 상당히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나는 독파에 성공했고, 그리하여 지금은 말할 수 있다.


칼림퐁에 위치한 집 ‘초오유’에는 은퇴한 판사 제무바이, 힌두어밖에 할 줄 모르는 요리사, 제무바이의 애견 무트가 살고 있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 부모를 여의고 외할아버지 손에 맡겨진 십대 소녀 지안이 함께 산다.


이게 책 소개 부분인데, 틀린 부분이 있다. 지안은 외할아버지 손에 맡겨진 소녀 '사이'의 수학가정교사다.



;;;;;;;




이 책은 인도출신 여성작가, 키란 데사이에 의해서 쓰여진 인도의 구석진 도시 칼림퐁, 미국 뉴욕 빈민가, 영국 케임브리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576페이지에 달하는 책이다. 배경은 1986년쯤을 기준으로 하긴 하는데 과거로도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하고 무척 깔끔하게 연결되어 무리가 없다. 맨 처음에 중요하지 않은 듯이 제시되는 두 개의 가방을 중요한 소재로 하여, 능수능란하게 이야기가 펼쳐져 나간다. 판사, 요리사, 판사의 손녀 '사이'를 중심으로 한 여러가지 인물들이 나온다. 고독하게 자라는 사이, 그 주변의 시골에서 여유롭게 살아가는 인텔리 자매, 사랑을 한 적도 없이 늙어가는 자매 중 동생, 낙농을 하는 신부, 술주정뱅이 등등. 미국이나 영국은 여태까지 책에서 많이 접해보았고,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도도 '영국식으로 차를 끓일 수는 있어도 인도식으로는 차를 끓여본 적 없는' 소녀가 있을 정도로 서양문물에 익숙한 사람들의 생활 얘기들이 등장하여 그다지 낯설지는 않았다.


부모를 잃은 고독한 소녀 '사이'는 '지안'과 사랑에 빠지지만 사회적 견해차이(우리나라식으로 하면 이건 정치적 견해차이가 아닐까)로 관계가 점점 멀어지고, 평온하고 변함없는, 미국에 간 딸이 잘났니 영국에 간 딸이 잘났니 미국 간 아들이 데리러 올 거라느니 하며 살아가는 주변사람들 모두에게 변화를 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한다. 폭동, 아니, 반란이 일어나 도시 칼림퐁은 외부와 두절된다. 엉둥한 사람이 경찰에 도둑으로 몰리고, 그 사람의 가족은 판사에게 매달린다. 판사는 떨쳐버리려 했던 것들이 다가오자 두려움에 떨고, 그가 유일하게 신뢰하는 암캐 무트가 납치당한다...

요리사의 아들 비주는 미국에 불법체류 중으로 그린카드(미국영주권)을 얻기 위해서 고군분투하지만 그건 그렇게 쉽지 않다. 미국에 간 인도인들처럼 고기를 먹는 등 계율을 버리고 살 수 없었던 비주는 점점 더 고향을 그리워하고, 그 와중에 고향 칼림퐁에 반란이 일어나 외부와 두절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아버지의 생사와 자신의 공허에 갈팡질팡하고...


사이의 모습을 보면서 느낀 것은 사랑은 어디서나 똑같구나, 였다. 둘이서 연애를 시작하는 과정은 달달하고 참 부러워지더라. 사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사이의 사랑과 연애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사이를 중심으로 보면 이 이야기는 그저 좀 색다른 로맨스 소설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둘은 서로를 갈망하고 그리워하는 상태에 있다. 좋아하고 만나고 싸우고 다시 만나고... 그러나 처음에는 그저 조짐만 보이다 중반부와 후반부를 휘몰아치는 폭풍 같은 칼림퐁의 반란은 이 책을 그저 연애라는 부분에만 집중할 수 없게 만든다.


칼림퐁의 반란은 소수민족의 반란이다. 군인으로 일해온 구르카 족이 자치를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킨 것인데... 그 반란의 기저에는 가난이 깔려있다. 차 농장이 10개 있어도 주민의 80%를 차지하는 구르카족이 주인인 농장은 하나도 없다. 그들은 여기에 불만을 가지고, 인도인들은 자신들을 잘난척하며 멸시하는 서양에 주눅들거나 따라하거나 불만을 가진다. 책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것은 아무 까닭없이 생긴 일이 아니라 칼림퐁과 떼어놓을 수 없는 해묵은 분노에서 생겨난 일이라는 것을 롤라도 알고 있었다. (중략) 얼마전까지만 해도 자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단순한 이유로 그들에게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이 남의 부러움을 사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중략) 롤라와 노니는 몇 세대에 걸쳐 남들과 나누어야 할 빚을 도맡아 치르게 되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도는 여태까지 여러 경로로 접해온 영화나 여행기에서 등장하는 인도라는 나라와는 다른 느낌이 든다. 낯설다. 이 낯설음은 무얼까. 적어도 인도 가면 돌아 오기 싫다는 소리 같은 것에 익숙해진 나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구도자들의 나라가 아닌 거칠고 원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들이 등장해서일까. 그 낯설음 가운데 등장하는 눈에 익은 맥도날드, 치킨, 브로콜리, 치즈, 초콜렛 등의 이름들은 인도의 것이 아니다. 인도가 배경인 부분에서도 익숙하게 나타나는 이름들은 인도의 서구화를 보여주는 동시에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의 서구화를 보여준다. 그리고 서양의 것이 아름답고 청결하고 좋은 것이라 생각하는 인도 사람들의 모습은 글쎄... 지금의 나와도 닮아있는 것이 아닌지.

사실 그렇다. 종교와 문화가 다름에도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현대 한국사회를 떠올렸다. 인간사 다 닮아있거니 하며. 동서양의 충돌뿐 아니라 가난함의 존재방식에 대해서도. 가난은 상속되며 끝없이 무언가를 상실하게 한다. 가난한 비주는 무엇을 잃었는가. 비주는 무엇을 잃지 않기 위해서 갈등하는가. 아들 비주에게 인도로 돌아오지 말라고 했던 요리사는 그가 무엇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것인가.

부유해보이는 사람들도 무언가를 잃어가며 살아간다. 판사를 보라. 판사는 가난하지 않다. 적어도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가난하다는 것이 경제적인 것뿐일까? 영국에서 수학한 인도인인 판사 제무바이는 위의 문장에서 등장한, '영국에서 지독한 열등감을 느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엘리트다. 그러나 저 문장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이 무엇인지 아는가.


결국 그는 아예 인간이라는 기분도 거의 느끼지 않게 되었고, 누가 팔을 만지기라도 하면 그런 친밀한 접촉을 참을 수 없는 것처럼 펄쩍 뛰어올랐다.


그 사람은 과연 부유하다거나 부족함이 없다고 일컬어질 수 있는 사람인걸까. 영국으로 가기 전 신혼 첫날 밤 어린 아내가 두려움에 떨며 살려달라고 하자 아내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은 그가, 영국을 다녀와서는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 그는 무엇을 상실했는가.


현대를 살아가는 나는 무엇을 상실하며 살아가는가. 이 책은 다각도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 현대 인도사회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상실. 그리고 그 상실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 생각할 수록, 쓸수록 할 말이 많아지는 책이라 미흡함을 알면서도 이만 접는다.



ps- 중간의 '바즈'라는 이름이 '비주'의 오역이 아닌가 잠시 의심했다. 지금도 잘 모르겠다.
ps- 날린 건 아닌데, 뭔가 저거 말고 더 써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문장이 안 잡힌다;;;; 이런 난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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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꽃선군 2009/01/09 22:26 # 답글

    그저 잃기만 하는 건 슬픈일이죠.

    무소유였는지 뭐엿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소유의 법칙은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얻는 것이니, 잃을 땐 잃더라도 좋은 거 하나 얻게 되었으면 좋겠네요. :)

    그나저나 576페이지를 세시간만에 읽으시다니 존경합니다 ㅠ
    전 300페이짜리도 세시간에 못 읽는데 말이죠ㅠㅠ (그래서 엄청나게 느리게 읽으면서 내용도 기억못한다능..)
  • 시오 2009/01/09 22:50 #

    꽃선군 님 // 앗, 읽어주셨군요. 저, 사실은.. 본문에서 적었다가 지우긴 했는데, 읽으면서 꽃선군 님이 쓰셨던 생활력에 대한 글이 생각났었어요. 왠지, 생각이 나더라구요.

    세시간이 아니라 네시간일지도 몰라요; 책은 계속 읽다보면 속도도 붙고, 그렇겠지요..^^ 전 또 독서삼매경에 빠져서 설겆이를 안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쩌면 좋을까요....;;;

    잃을 때 잃더라도 좋은 거 하나.. 네, 정말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네요..^^
  • 2009/01/10 10:48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시오 2009/01/10 12:59 #

    비공개 님 // 네, 리뷰 쓰는 거 어렵지요. 그, 그치만, 공짜란 좋은 거예요..ㅠ_ㅠ

    읽은 느낌이 잘 전달된다니 다행이네요. 이거 감상쓰면서 정말 오랫만에 회의를 느꼈답니다orz
  • 2009/01/12 20:08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시오 2009/01/13 21:52 #

    비공개 님 // 네, 그렇게 하세요..^^
  • 모아 2009/01/13 14:06 # 답글

    베스트 리뷰에 선정되셨더군요. 정말 축하드립니다.
    읽은 느낌을 잘 표현하셔서 그런지 제가 책을 읽은 것
    같네요. :)
  • 시오 2009/01/13 21:53 #

    모아 님 // 과찬이십니다.^^ 하지만 모아 님이 알려주셔서 베스트리뷰에 당첨된 걸 알았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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